얼마 전 뉴스에서 1인 가구가 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현재 5 가구 중 1가구는 1인 가구이며,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머잖아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1인 가구가 늘고 있는 추세인 만큼 생활패턴도 1인 가구에 맞게 변화되고 있으며, 이렇듯 변화된 양상이 새로운 생활 풍속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예컨대 나홀로족의 식사편의를 위해 고안된 식당에는 독서실에서나 볼 법한 개인용 칸막이가 돼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고독하게, 서먹하게 식사를 즐길 수가 있다(여기서 밥 한번 먹자는 멘트는 시의성도, 설득력도 잃고 만다). 사람은 관계의 동물인 탓에 사회생활을 접을 수야 없겠지만, 그 와중에서도 마치 저 홀로인 듯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마다 고립된 채로 관계할 수 있다면, 관계를 최소화하면서 관계할 수 있다면, 관계하지 않으면서 관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르시스의 자손들인 나홀로족, 방콕족, 코쿤족, 그리고 히키코모리족이 사회문화적 현상을 넘어 새로운 의사 유토피아(즐거운 고독과 기꺼운 고립이 존중받는 사회?)를 열어놓고 있다면 과장이고 비약일까.
김남현의 작업이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특히 Single 연작이 그러한데, Single은 바로 싱글족이며 나홀로족이 아닌가. 싱글족은 세계가 온통 자기(개인)의 생활패턴에 맞춰 재편되기를 꿈꾼다. 1인용 세계, 1회용 세계, 인스턴트 세계, 맞춤세계를 꿈꾸는 것. 이를테면 1인용 소변기와 좌변기, 1인용 강의실, 1인용 트램펄린, 1인용 병상, 1인용 욕조, 1인용 군대막사, 1인용 목발, 1인용 집, 사랑을 나누기 위한 1인용 룸, 그리고 1인용 숲과 1인용 산책로에 이르기까지.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때로 생뚱맞은 경우가 없지 않지만, 여하튼 1인용에 맞춰 물건을 생산하면(그리고 자연은 가공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산된 물건들의 모양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물건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체형에 맞춘, 사람 형태로 변형된 방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방을 입듯 문을 열고 그 방 안에 들어가게끔 돼 있고(여기서 때로 방문이 없다거나, 실제로 여닫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방 안에 갇히게끔 돼 있다(작가의 또 다른 작업인 Confined One 시리즈는 갇힌 개인을 다루고 있다). 물건 따로 사람 따로 라야 비로소 사람이 그 물건을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건 숫제 물건과 사람이 하나로 합체된, 말하자면 물건사람 혹은 사물인간(사물화 된 인간)의 형국을 하고 있다. 물건과 사람이 합체돼 있으니, 물건으로서도 불완전하고 사람으로서도 기형인 꼴이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나홀로족을 위한 1인용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1인용 세계에 대한 싱글족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임이 드러나고, 그 꿈은 사실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발아된 것임이 드러나고, 꿈 자체가 현실인식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악몽)이었음이 드러난다. 억압적인 현실의 알레고리? 억압적인 현실을 내재화한 채 사물화 된 인간의 알레고리? 이렇게 나는 교육환경에서 억압적인 현실을 느끼고(1인용 강의실), 군대의 규율 앞에서 기계적이게 된다(1인용 군대막사).집에서도 마저 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숨통을 조여 오는가 하면(1인용 집), 심지어 유년시절을 추억할 때조차도 쓸쓸하다(1인용 트램펄린). 여기서 교육과 군대와 유교는 개인에게 억압적인 현실을 심어주는 규격화된 사회(마치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체계화된 사회(시스템으로서의 사회), 정비된 사회(기계사회), 때로는 감시사회(전자정부)의 롤모델로 작용한다. 이에 반해 트램펄린은 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데, 현실을 박차고 공중부양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중부양마저도, 현실이탈마저도, 꿈꾸기마저도, 추억하기마저도, 공공연한 유희와 놀이마저도 저 홀로라고 한다면 다만 고립감을 증언하고 재확인시켜주는 계기로서나 작용될 뿐이다.
한마디로 작가가 만든 물건들(마찬가지의 의미지만 공간들), 사람체형을 닮은 물건들은 사실은 사람을 가두는 틀(교육의 틀, 관습의 틀, 종교적 신념의 틀, 이데올로기의 틀 등등) 같고 감옥 같다. 실제로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파생시킨 처음의 계기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1인용 감옥 혹은 감옥인간을 들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의 모든 작업은 이 감옥인간으로부터 출발했다. 우연한 기회에 감호소의 독방을 구경한 적이 있지만 이처럼 사람 체형에 맞춘 이른바 맞춤식(차라리 고문기구 같은)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감옥인간인가. 작가는 개인사로부터 자폐를 떠올린다. 자폐란 자기 자신에게 갇힌, 자발적으로 자신을 자신에게 가둔 상태를 의미한다. 작가는 자신이 그랬듯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실제로도 그렇고, 그래서 작가의 개인적인 문제의식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Confined One 시리즈로 명명된 일련의 작업들이 유래한다. 갇힌 사람들이고, 자기 자신에게 갇힌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무엇에 갇히는가. 종교적 신념에 갇히고(기도하는 사람) 유교적 관습에 갇히고(엎드려 절하는 사람), 사랑에 갇히고(키스하는 사람), 규율에 갇힌다(경례하는 사람). 그리고 그 갇힘을 조형화한 일련의 구조물들은 그 갇힘을 실감나게 할 만큼 무슨 휴대용 감옥 같고 고문기구 같고, 교정도구 같다. 이를테면 그 도구를 착용하고 기도하는(종교적 이데올로기), 엎드려 절하는(관습의 강령), 키스하는(사랑의 맹목), 경례하는(규율의 엄격함) 정자세를 학습하는 것이며, 전형화 된 자세와 태도를(그리고 일종의 행동강령마저) 배우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관습이란, 그리고 규범이란(사랑은 좀 예외적인. 그러면서도 그 역시 맹목과 맹신의 행태를 띤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원래 제도가 개별주체에게 심어준 것이며, 그렇게 개인에게 내재화된 것이다. 이 엉뚱하고 섬뜩하고 발랄한 자세교정기들은 이렇듯 제도의 프로젝트를 물화한 물신들 같다. 관습과 규범을 거부하는 개인들을 잡아다가 관습과 규범을 몸에 익히게끔 만들어주는 잔혹하면서도 깜찍하게 생긴 페티시 같다. 이 일련의 페티시들 언저리에 감옥과 성이, 가학과 피학이 어른거린다.
미술비평 고충환